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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중국 천안문 6.4항쟁(천안문 사태) 간단 정리

by 킴앤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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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중국의 민주화 운동. 총 두 차례의 천안문 사태가 있으나 흔히 말하는 천안문 사태는 1989년에 있었던 2차 천안문 사태를 일컫는다. 천안문 6.4 항쟁이라고도 불리며 중국 공산당이 장갑차를 동원해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이 사망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탱크맨
천안문 사태의 상징이 된 탱크맨

천안문 사태 과정 요약

지식인과 대학생들의 주도에 각계각층의 시민들, 법조인과 공무원들까지 합류한 범국민적인 평화시위였다. 평화시위였던 만큼 지도부조차 중국 공산당의 무력 유혈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 

 

1976년 마오쩌둥(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덩샤오핑(등소평)이 집권하면서 중국의 대권을 쥐게 된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였으나 관료의 부패, 실업과 인플레이션, 빈부 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각종 범죄가 폭발했고 덩샤오핑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다수의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고 체포 1주일 만에 처형을 실시했다. 이러한 강경책 속에서도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당간부와 유력자들은 법망을 빠져나가고, 개혁개방 초기 내부 정보를 독점하여 떼부자가 된 정부 관료 혹은 친인척이 늘어나면서 중국 국민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이후 일당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민주화를 추진하고 정치를 개혁해야한다는 민중의 목소리가 일어났다. 개혁개방을 통해 들어오는 해외 문물을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던 국민들은 같은 공산주의였던 소련이 다당제를 보장하고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를 펼치는 것을 보자 중국 공산당에게 대대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대학생 지도부의 우얼 카이시는 한국의 1987 6월 항쟁이 천안문 항쟁의 모델이었다고 밝혔다.

 

6월 3일 밤 무력진압 명령이 떨어졌고,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과 멀리 떨어진 지역의 군인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총살하고 탱크로 치어 죽였다. 밤새 수 많은 시위대가 사망하고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보와 대만계 가수 허우더젠 등의 '천안문 사군자'들이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를 중재했고 중국 정부 측의 해산 강권에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지도부에게 이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의 해산이었지만 이는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대다수의 지도부는 수배 명단에 올라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중재자였던 류사오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6월 4일 당시 천안문 광장에는 불에 탄 탱크와 사망한 시민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중국 정부가 사망자 등의 피해 결과를 기록하지 않아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 천안문 항쟁 BBC 보도영상 < https://youtu.be/kMKvxJ-Js3A

bbc 보도영상

천안문 항쟁 그 이후

고성장기에 접어들었던 중국은 국제적으로 큰 비난과 함께 타격을 받았으며 이를 수습하기 위해 한중 수교를 수립하는 등 많은 국제적인 행보를 펼쳤다. 그러한 노력 끝에 크게 꺾였던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다시 두 자릿수를 회복했다.

 

이후 개혁개방에 따른 자유화의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을 문제로 판단한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신입생 선발을 줄이거나 중단했고, 89년도에 졸업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데모 진압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시위대가 먼저 공격했을 때만 강제진압이 이루어졌다는 등의 사상교육을 강제로 진행했다. 89년도 졸업생들은 1년간 취업이 금지된 채로 농촌으로 보내져 정신개조를 당했다.

 

천안문 항쟁은 통일 분위기가 고조되던 대만과의 관계를 한 순간에 단절 시켰고, 통일 반대를 주장하는 민진당이 대만 정치의 주류가 되는, 대만 내에 민주주의가 확고히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19년에는 천안문 항쟁 30주년 행사가 열리며 탱크맨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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